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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는 원래 마음대로 올릴 수 있나? — 일본이 53년 걸려 되찾은 '관세 자주권'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개항과 근대 · 6편← 5편 인천 차이나타운은 왜 그 자리에 있을까지금은 나라마다 자기 법으로 관세를 정합니다. 이걸 '관세 자주권'이라고 해요. 그런데 170년 가까이 전 일본은 이 권리가 없었습니다. 서명 한 번에 넘어간 권리를 되찾는 데 1858년부터 1911년까지, 꼬박 53년이 걸렸어요.요즘 뉴스엔 "관세 인상"이란 말이 거의 매일 나오죠.그런데 문득 궁금해집니다. 관세는 원래 한 나라가 혼자 마음대로 올리고 내려도 되는 걸까요?답은 "원칙적으로는 각 나라가 정한다, 다만 스스로 한 약속 안에서"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조차 남이 정해 주던 시절이 있었어요. 오늘은 그 권리를 되찾으려고 반세기를 버틴 나라, 일본 이야기입니다.1859년 요코하마 개항, 세관(운상소) 앞 ..
후추는 어떻게 식탁마다 놓이게 됐을까 — 1,600년 전 로마의 몸값에서 답을 찾다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물건의 무역사 · 1편후추가 지금 식탁마다 있는 건, 바닷길이 열려 중간 상인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후추는 도시 하나의 몸값으로 낼 만큼 귀한 물건이었어요.라면 끓일 때 톡톡, 계란 프라이에 톡톡.마트에서 몇천 원이면 한 통 사는 후추. 그런데 이 작은 알갱이가 한때는 금이나 은과 나란히 적히던 물건이었다면, 믿어지시나요?408년 로마가 바친 몸값 속 후추 (AI 생성 이미지)로마의 몸값에 들어간 후추서기 408년,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합니다.굶주린 로마는 결국 돈을 내고 포위를 풀어 달라고 하죠. 이때 몸값 목록이 기록에 남아 있어요.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비단 옷 4,000벌, 붉게 물들인 가죽 3,000장.그리고 마지막 줄..
인천 차이나타운은 왜 그 자리에 있을까 — 140년 전 조계지에서 답을 찾다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개항과 근대 · 5편← 4편 강화도조약에 관세가 없었던 이유인천 차이나타운은 1884년 청나라 '조계'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조계는 남의 나라 항구 안에, 외국이 자기 규칙으로 다스리던 구역이에요. 그 원조는 40년 앞서 생긴 상하이 조계였습니다.주말에 짜장면 먹으러 가는 인천 차이나타운. 빨간 등이 걸린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문득 궁금해집니다.왜 하필 여기일까요? 서울도 아니고, 바닷가 언덕 한쪽에.답은 140여 년 전 지도에 있습니다. 그 시절 이 언덕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거든요. 선 이쪽은 청나라 구역, 저쪽은 일본 구역. 조선 땅인데 조선 규칙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었어요.1880년대 인천 청나라 조계 거리, 지금의 차이나타운 자리 (AI 생..
강화도조약에 관세가 없었던 이유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개항과 근대 · 4편← 3편 로버트 하트 — 남의 나라 세관을 48년 동안 운영한 영국인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문을 열었는데, 정작 관세는 한 푼도 못 걷었습니다. 처음 세금을 걷어본 세관은 3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요. 제대로 된 세율표가 생긴 건 7년 뒤인 1883년입니다.지난달, 그러니까 2026년 9월 28일. 부산 동구 수정동에 돌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관세청이 세운 '두모진 해관' 기념석이에요. 관세청은 이날을 아예 '세관의 날'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대체 무슨 세관이길래 기념일까지 만들까요?딱 3개월 문을 열었던 세관입니다. 조선이 처음으로 "우리 문 앞에선 우리가 세금 걷겠다"고 나섰다가, 일본 군함을 보고 접어야 했던 곳이죠.3편에서 청나라 세관을 영국인..
로버트 하트 — 남의 나라 세관을 48년 동안 운영한 영국인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개항과 근대 · 3편← 2편 2차 아편전쟁 — 깃발 하나 때문에 베이징까지 쳐들어간 영국한 나라의 세관을 외국인이 책임진다면 어떨까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세기 청나라에서는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것도 약 반세기 동안이요.2편에서 아편전쟁에 진 청나라가 조약으로 관세율까지 묶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편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청나라 세관, 즉 해관(海關, Chinese Maritime Customs Service)의 최고책임자 자리에 앉아 48년 동안 청의 관세를 걷은 영국인, 로버트 하트(Robert Hart)입니다.그리고 이 이야기는 뜻밖에도 조선의 세관으로 이어집니다.시작은 상하이, 주인 없는 세관에서▲ 1850년대 상하이 황푸강변. 배는 들어오는데 세금을 걷을..
2차 아편전쟁, 깃발 하나로 시작된 전쟁 시리즈: 세계와 무역사 · 개항과 근대 · 2편← 1편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차 때문이다2차 아편전쟁(1856~1860)은 배 한 척의 깃발 문제로 시작해,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며 끝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편은 세금을 내는 합법 수입품이 됐고, 중국은 항구 10곳을 더 열었습니다.1차 아편전쟁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1842년 난징조약. 영국은 홍콩을 얻고, 다섯 개 항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영국 상인들의 표정이 영 시원찮았습니다."이게 다야?"중국 내륙으로는 여전히 들어갈 수 없고, 아편은 여전히 밀수품 취급이고, 베이징에는 공사관 하나 세울 수 없었습니다. 14년 동안 불만은 쌓여만 갔습니다. 영국은 '조약 개정'을..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차 때문이다 여러분, 영국 사람들 차 진짜 좋아하잖아요. 하루 평균 3잔씩 마신대요. 근데 이 사소한 습관 하나가 19세기, 두 제국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차에 미쳐버린 섬나라 18세기 영국에서 차는 국민 음료가 됐습니다.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차를 왕창 수입해왔죠. 근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중국은 영국 물건에 1도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차는 사오는데, 팔 건 없고. 그러니 은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줄줄 새어나갔어요.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죠. 무역적자의 교과서 같은 상황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다" 적자가 쌓이자 영국이 중국에 시장 개방을 요구했습니다. 건륭제의 대답이 걸작이에요.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오랑캐의 물건을 들일 필요가..